발목을 다쳐 미리미리 다니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다. 4개 일정을 연속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일어나서 10분 동안 노래를 들으면서 오늘의 루트를 체크했다. 사실 늘 지하철 빠른환승 발판까지 체크하긴 하지만 시간 약속 지키기는 늘 어려웠다. 루트를 상상하는 것은 즐겁지만 시간이 뜨거나 미리 도착해있는 기분이 싫어서. 단비같은 행동을 했다.


내 시간이 뜨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면서 타인의 시간 뜨는 것은 왜 그리도 민감하지 않았나. 여로모로 반성 중이다.
에어팟을 끼고 집을 나선 순간-느낌이 온다. 오늘은 조금 신경이 예민한 날이다. 타인에게 까칠하게 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물들이 오감에 퍽 강하게 다가온다. 비유하자면 글의 제목과 같은 느낌. (과산화수소와 과탄산소다 중 뭐를 쓸지 잠시 고민했지만 소다의 어감이 좋아서..)
소니 헤드폰을 끼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분리수거 함에서 페트병을 꺼내는 경비원을 보다.
나는 그 순간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다.
양서류와 비슷한 색깔의 등산복을 입고 장난감 병정들처럼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다. 하산하고 오는 길인지 등산하러 가는 길인지 애매한 시간대라 고민이 되었다. 저들이 등산하러 가는지 하산하러 가는지는 내 인생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지만 이러한 상상 멈추기는 쉽지 않다.
칼집이 난 것처럼 반절이 날라간, 꽤나 잘 나가는 한의원 현수막을 보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생각한다.
샹들리에처럼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도로의 cctv를 보다. 곡선은 매력적이다. 한강대교 교각 아치에서 투신한 남성이 구조되었다는 기사를 연상한다. 저마다의 발에 자리잡은 아치에 생경함을 느낀다.
수술하라는 어머니 말 듣지 말고 계속 재활치료를 받으라는 물리치료사의 엉겨붙은 속눈썹과 그 사이 눈송이처럼 내려앉은 글리터를 보다. 평일에는 왜 시간이 안 되냐는 말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답하기 곤란하거나 귀찮은 질문에 웃음으로 떼우는 어른이 혐오스러웠는데 내가 그러고 있다. 일주일 만에 통증이 많이 줄어서 다행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깨끗한 속눈썹과 투명렌즈의 테두리를 보다. 저번 주에 갑자기 울어서 죄송하다고 사과드렸다. 힘줄과 인대, 혈관과 뼈 구조에 대한 설명을 알아듣고, 유희왕 카드처럼 해부 아틀라스가 떠오르는 내가 이상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탈지 계단으로 내려갈지 짧게 고민하다가 팔자걸음으로 계단을 주파하는 소년을 보다. 살 좀 빼겠다고 최대한 에스컬레이터 말고 계단을 택했던 과거가 스친다. 자유로운 걸음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큰 축복 중 하나. 스크린도어에 비친, 3주만에 꽤나 정상인처럼 걷게 된 내 모습에 흡족해 한다. 처음 깁스를 했던 중학생 때에는 대학에 가서 하이힐을 신지도 못해서 예쁘게 꾸밀 수 없겠다는 생각에 그냥 죽고 싶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결국엔 살아지더라고. 그냥 그때의 나는 예쁘고 싶었나보다 하는 마음으로. 닌텐도 동물의 숲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바닷가에서 유리병 편지를 받거나 보내봤을 텐데-유리병편지를 받거나 보내는 마음으로 과거와 미래를 상대한다. 病을 받아들이니 마음은 고요하게 먹먹하고 서글프다. 하지만 익사당하진 않을 터.
경추를 꺾어 시퍼런 하늘에 구름 모양 도넛을 보다. 소금우유 도넛, 크림도넛보다 먼저 떠오르는 삽화가 있다. 한 번 본 사이에 도넛 여러개를 사들고 우리집 앞으로 왔던 사람이 있었고 나는 무서움과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전부터 궁금해했던 그 도넛 박스를 받았다. 티라노사우르스처럼 다 먹어치웠다. 도넛 6개를 먹고 4시간 후에 3개정도는 토했던 시절이 있다. 먹는 순간에는 버겁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뒤늦게 역류하는 이상기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인 날씨의 아이에서 하늘이 뚫린 것처럼 거칠게 내려오던 물방울들을 회상한다.

아픔과 두려움과 불편함. 그 감정마저도 혼탁하다면, 조금 미리 아팠던 사람들이 남긴 활자에 sos를 날릴 수밖에. 도서관에서 폭식증에 대한 책을 양 팔에 끼고 돌아와 상현달이 보름달이 되어가는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읽었다. 2021년 11월 13일엔 개인 블로그에 폭식에 대한 글을 썼다. 응원 댓글 마저도 따끔하게 먹어치웠다.

난 작년에 요가 덕분에 처음으로 살이 좀 균형 있게 빠지는 것 같아서 신났는데 동시에 점점 무서워졌다. 2021년 여름에 인생 최악의 폭식을 겪고, 건강한 신체를 갖는 데에 걸리는 시간보다 다시 원래 불건강한 상태로 돌아가는 시간이 훨씬 짧다는 점에서 무력감을 느꼈고. 그 무력감은 폭식중추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그래 나는 그때 울면서, 해동도 덜 되어 살얼음이 낀 빵을 베어먹었던 그 차가움과 눅눅함을 기억하고 있다. 딱딱했다. 공장의 부품처럼 나는 빵을 빨리 조각내서 창자에 밀어넣기를 수행중이었다. 당연히 미뢰는 작동하니 짭쪼롬하고 달콤한 맛도 났다. 지금 먹으면 다음 날 아침과 점심을 먹으면 안 될 것도 알았고. 다행스럽게도 지금 나는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을 때 먹는다. 운동도 매일 하지는 않아서 살도 조금 쪘다. 그래도 괜찮다. 내가 나를 괜찮아하는 연습. 변화는 한 순간에 이뤄지지도 않으며 불편함이 수반된다. 변화하지 않아서 불편할 것인지 변화하면서 불편할 것인지 고르는 것도 자유이자 능력이라는 생각. 능력이라는 단어 적으면서도 입천장이 조금 불편해졌지만 요지는 나는 나를 괜찮게 생각해.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조금 더 아름답고 편리하게 겪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

5월 화창한 낮에 임시저장했던 글.
더 늦추면 안될 것 같아서 수정하지 않고 뒤늦게 툭.
조금만 버티면 본3 1학기 끝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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