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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얕은 오만을 우리는 자존심이라고 불러

안나 카레리나 같은 책인가? 책의 첫 인상이다.

오만과 편견에 대한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이 책을 읽었다. 살다 보면 오만과 편견이 어떤 책이라는 일종의 관념을 형성했을 확률도 높은데 슬프게도 주변에서 딱히 '책 오만과 편견'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은 많았고. 스포일러 없이 감상하기 시작한 이 책은 요즘 유행하는 '릴스'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 이름 외우기가 좀 버거웠지만 (왜 엘리자베스가 일라이자이고 리지인가?) 빠르기도 깊이도 적당했다. 유난히 재밌었던 이유를 떠올리자면 인물에게 이입하려는 순간에 한 걸음 물러나게 해주는 작가의 설명이다.

 

사실 실존 인물이 아니라서 원한을 가질 필요가 없다. 어쩌면 작가가 손으로 잉태한 생명체라 애정이 가득해야 마땅한데, 작가가 그려내는 몇몇 인물은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드라이해서 더 아프다. 예를 들자면 메리. 나는 작가가 메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가끔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재능과 소양은 없으나 허영심은 있는 메리를 통해 거울에 비친 내 오만과 편견이 얼마나 못생겼는지 되돌아볼 수 있었다. 이것은 하루 끝에 나를 되돌아보는 일기를 쓰는 것과는 다르고, 누군가가 내 뒷담화를 하는 장면을 엿보는 것과는 다르다. 제인 오스틴과 메리를 통해서 나를 직시한다. 제인, 다아시 등의 선택이 빚어내는 사랑 이야기보다 내게 더 인상깊었던 것은 나와 주변을 섬뜩하리만치 건조하게 돌아볼 수 있게 만든 작가의 능력이다. 귀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릴스같다고 했던 표현을 이런 점에선 취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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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은 몇 달 전쯤 핸드폰 메모장에 홀린 듯이 적어놓은 구절이다. 당시의 나는 --에 합류하게 될 줄도 몰랐고, 남들이 인생 책으로 손꼽는 오만과 편견을 곧 읽게 될 줄도 몰랐다. 남들이 다 소유한 관념은 가끔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예를 들면 영화 인셉션도 아직 보지 않았고, 체념이나 응급실 등의 노래도 잘 모른다. 그러니까 정말로 불현듯이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오만하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는데, 그 오만은 적당히 얕았으며, 자존심으로 치환될 수 있다고 느꼈다.

 

책의 원제는 pride and prejudice다.

사전에 pride를 검색하니 3가지 뜻이 나온다.

 

  1. 자랑스러움, 자부심, 긍지 2. 자랑거리 3.자존심

 

오만과 편견을 읽을 일이 없었더라면 (이미 읽고 싶은 책 개수가 올해 읽을 수 있는 책의 예상 권수를 넘겨서 - 아마 올해 안에 자의로 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pride의 뜻을 찾아보지도 않았을 거고. 나의 오만한 번역 능력에 확신에을 얻을 수 없었겠지. 그래서 명랑하고 사랑스러웠던 책 내용과는 별개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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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만과 편견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없다.

나의 가장 순수한 생각이 누군가에겐 혐오스러운 오만과 편견이다.

혐오스럽지 않을 정도의 얕은 오만

이를 수용하는 능력이 일종의 요즘 말하는 '그릇'이나 '이해심'이 된 것 같다.

 

---그리고

 

눈 앞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사람이 있다. 강연자가 말하는 그거, 나도 엄청 잘 안다는 걸 티내기라도 하는 모양새. 나는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쳐다보며 훨씬 오만해진다. 오만. 턱끝이 올라가고 콧망울이 동공 밑에 비칠 정도가 되면 오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