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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 검은 잎/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안물안근황

안물안궁 근황,,,

 

#1

일요일 외출. 아침침 놓고 드레싱하고 퇴근하고 헬스하고 밥 먹고 씻고 예술의전당에 가서 뭉크 전시회를 보고 근처 카페에 왔다. 저녁이니 디카페인 원두 옵션을 택하거나 , 아메리카노가 아닌 시그니쳐 커피를 고르는 건 사치다. 사치는 대개 부리면 안 돼서가 아니라 부리게 돼서 쓰는 단어 아니던가. 흐름에 벗어나지 못했고 어푸어푸 몇 글자 두드려보고자 한다.

 

 

#2

신기한 현상. 딱히 할 말이 없다, 요즘은.

여러 이유로 아무튼 먹고 자고 싸는 동물처럼 살아간다.

 

#2-1

조사를 하나 추가하자.

먹고 자고 싸기만 하는 동물처럼 살아간다.

 

#3

벌써 인턴 1년 절반이 지났다. 3월 1일에 입사했고 2월의 마지막 날까지 일해야 한다. 

6달 중 절반은 병원에서 잤다. 당직은 주로 이틀에 한 번 꼴이니 말이다.

3달 중 절반은 선잠을 잤고 절반은 수면에 지배당했다. 이러나 저러나 썩 능동적인 잠은 아니었다.

 

 

#4

최근들어 비교적 일찍 자고 비교적 일찍 일어나는 게 덜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 다른 블로그엔 이게 적응인지 순응인지 하는 글을 5시 45분에 지하철에서 발행했다. 응은 신기한 낱자다. 적응인지 순응인지 아무튼 입동굴을 울리며 단어가 마무리되기에 차이점보단 공통점이 끝맛에 남는다. 적응의 결과와 순응의 결과는 대개 일치한다. 그말은 즉 행동이 아니라 행동 이전의 생각에 차이가 있어서 두 단어가 연리지가 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셈이다. 무슨 마음을 가져야 적응을 하고 무슨 마음을 부여받아야 순응을 하는가. 나에겐 수능보다 순응이 폭력적이다. 그렇게 나는 병원에 순응하며, 병원에 적응한 행동양식을 남들보다 다소 늦게 익혀가고 있다.

 

 

#4-1

밖에서 맨 발로 슬리퍼를 신은지 얼마 안 됐다. 올해가 거의 처음이다. 

발목이 안 좋아서도 그렇고 발 생김새가 썩 맘에 들지 않아서도 그랬는데 동시에 두 가지가 나름 해결됐다.

발목이 건강해져서도 아니고 발 모양이 달라져서도 아닌데

난 내 발에 순응하지 않고 적응했나보다.

 

#5

[개탄]스럽게도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다.

분[개]와 [탄]식 모두 긍정적인 마음에서 발아한 행동은 아니라고 여겨지는데, 긍정적인 행동에서 발아한 마음일 수는 있지 않은가. 달라진 내 모습을 남이 긍정하든 말든 일단 달라진다는 것은 참으로 껄끄러운 일이다. 새살이 돋을 때에도 껄끄럽고 딱지가 앉아도 껄끄러우니 껄끄러움을 껄끄러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촉각은 생각보다 빠르지 않은가.

 

#5-1

가령 아주 작은 불운에도 더 작은 행복을 어떻게든 급수대로 끌어와서 슬픔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굉장히 보편적인 사람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특별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둘 중 어떤 케이스든 문장은 성립될 수 없다.

사람은 늘 달라지기에 보편도 특별도 100% 확실한 문장을 짜낼 수 없다.

 

 

#6

아주 발칙한 생각이 든다.

나 정도면 꽤 괜찮다고..

괜찮다는 단어가 발칙한 건 아니고, '정도면'이 발칙하다.

(정도 : 사물의 성질이나 가치를 양부(), 우열 따위에서  분량이나 수준.)

 

#6-1

단어 하나를 제거하자.

나 꽤 괜찮다고.

 

#6-2 

치석보다 제거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나 안 괜찮다고 말하긴 참으로 쉬운데.

 

#7

뭉크의 팬은 아니다. 다만 불안하고 우울하고 공황발작을 겪었던 뭉크가 그린 그림이 꽤 궁금해졌다.

예술가와 우울증은 사람들이 애플 하면 파이라고 외칠 [정도]로 익숙한 연결이겠으나.

애플과 파이엔 반대 의견이 없지만 예술과와 우울증엔 반대 의견이 많다.

degenerate art로 평가받은 뭉크는 누군가에겐 예술가가 아닐 수 있고

여자의 나체나 어두침침한 자화상을 그리는 뭉크는 우울증 테스트에서 정상이 나올 수도 있으니

게다가 우울은 의지의 문제라고 하는 사람이나 예술은 취미로 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조차도 우울증과 비우울증의 경계에서 혹은 예술가와 비예술인의 경계에서 허덕일 확률이 높다.

 

#7-1

내가 나를 반대하거나 주변 사람이 나를 반대하면

비참해진다

 

#7-2

비참함에 익숙해진 사람을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은

확실해진다

 

#8

한의사를 할지 말지 생각해보려고 인턴을 했다고 말하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문제라서가 아니라 잘 전달되는 기분이 들지 않아서다.

 

내가 나름대로 이것저것 한다고 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살지 말지 생각해보려고 그런 것들을 해왔다고 볼 수 있겠다.

 

#9

무언가를 잘 하고 싶다고 밝히는 것은

아주 발칙한 고백이다.

나는 그걸 이미 하고는 있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것은

아주아주 고귀한 선언이다.

난 발칙할 자신도 고귀할 자신도 없는 것이다.

 

#10

직업에 대한 생각을 멈추면 

빈 자리엔

무엇에 대한 생각이 채울지

난 그게 더 두려운 것 같기도 하다.

 

#10-1 

사실은 [이 정도면] 안락한 보금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알면 안되고 알고 싶지 않은데 알아버렸고 모르는 척 하면 더욱 별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문장보다

인간의 오만은 끝이 없다는 문장이 더 먼저가 아닐까 한다.

 

#11

근황 마무리하고 집에 갈 것이다.

아직 안 죽었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와 질적으로 매우 다른 6개월을 보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복싱도 디제잉도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뒤뚱뒤뚱 걸음마를 시작했던 그때와

비슷하다고

유사하다고

생각한다면

어쩌면

나 괜찮다고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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