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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 검은 잎/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If I die tomorrow


만약 내일 죽는다면

양재천에서 가만히 노래를 듣다가, 랜덤재생에 의해서 오랜만에 듣게 된 노래 제목이다. (빈지노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듣다 보면 '삶이란게 좀 지겹긴해도 좋은건가봐' 이런 가사가 나온다


삶이 지겹다
삶이 좋다
지겨움은 좋지 않다
3가지 관념이 연결된 문장이다.

나는 저 관념의 연결에 불편함을 느낀다.


삶이 지겨운 적은 없었다.

((((((아직 대학생이지만))))) 같은 곳에 주 7일 출근해본 적이 있다. 아르바이트라는 직위의 가벼움과 무책임함도 일조했겠지만. 출근길은 지겨워도 삶이 지겹진 않았다. 여기에 3번째 관념이 심술을 부린다. 지겨움은 좋지 않다의 대우는 - 좋은 것은 지겹지 않다. 그래, 내가 좋아했던 것들을 별사탕처럼 나열해보자. 녹은 사탕도 있고 부서진 사탕도 있으며 아직도 반짝반짝 빛나는 사탕도 있다. 호불호의 애매함을 견디기 싫은 천성덕분에 별사탕의 개수는 좀 많다. 그걸 다 삼켜내느라 치과에 가서 여러 번 충치치료를 받았다. 치아의 관점에서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노트에 몇 문장 적는다. 진짜 열심히 준비했는데 세상에 나를 드러내자마자 제거당해야하는 사랑니로 태어났다면. 평생 소고기를 조각내야하는 비건 송곳니라면, 탕비실의 파쇄기와 불행배틀을 벌일 수도 있고. 수줍은 앞니는 웃기 싫었을 수도 있다. 오른쪽 어금니는 다소 게으른 왼쪽 어금니를 질투하느라 화병이 나서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


나는 현재를 현재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렵다.
나는 실존을 실존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정말로 어렵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에 사고가 나서 혹은 전기에 감전당해서 혹은 운석을 맞아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치곤 열심히 산다는 말을 들었다.
한의사는 이래서 싫고 회사원은 이래서 싫으며 공무원은 이래서 싫다는 내게 그냥 직업 자체가 싫은 게 아니냐고 했다.
타인의 발화를 어떤 별사탕으로 분류할지 점점 어려워진다.
내가 복잡해지는 만큼 타인도 복잡해지고 세상도 복잡해진다.
모든 복잡성을 관통하는 ESSENCE를 찾으려고 70억이 움직이는데-미동조차 않는 식물도 숨을 쉬며-번데기도 움직이는데-여기에서 비교로 나아가면 안되는데-나는 어떻게든 나의 좌표를 끌어내리고는 - 이번생은 망했어를 외치곤 했다. 전염되는 말일까봐 아주 작게 말이다. 베개에게.


아, 직업.
직업이라는 생각만 하면 지겹다.
직업이 좋은가?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삶을 직업과 동일시하면 안된다. 직업은 훨씬 하위개념이다.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동일한 문장구조를 사용할 수 없다.
김춘수의 시처럼 즉 이름처럼 직업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물론 근로소득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근로할 능력이 아예 없는 사람도 있다.
두 종류의 사람 모두 내 곁에 토성의 고리처럼 존재한다.
고리가 있어서 토성이라고 쓴 것도 있지만, 토할 것 같아서 쓴 것도 있다.


나는 삶이 좋지 않은데 지겹진 않다.
삶이란게 지겹지 않긴 해도 나쁜 건가봐.
라임은 망가지지만 훨씬 정확하다.


난초에 물 주기
낚시
재즈 감상
꽃꽂이
수영
내가 갖지 못한 주변의 별사탕들을 상상한다. 건강하고 깔끔한 상상이다.
그리고 차마 여기에 적을 수 없는 음울한 별사탕들도 있다. 상상이 더욱 쉽고 원초적이다.

어떻게든 교복 치마를 줄이고 싶었는데 사실 지금도 그렇다.
어떻게든 틴트를 바르고 싶었는데 사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절대로 나중에 학생에게 학생답기를 요구하면 안된다.
나도 모르게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대학가면 살도 빠지고 화장도 마음껏 할 수 있어'라고 말할까봐 이렇게라도 지금 기록한다.




지겨움을 감각하는 세포는 저마다 다르다.
내친구 a는 교복치마를 줄이지 않아도 지겨움을 탐지하는 미뢰가 작동하지 않는다.
나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미뢰랑 충돌할 때 혓바늘이 돋는다.
내 혀에 난 혓바늘은 내가 뭉툭하게 만들든지 삼켜내든지 해야 하는데
원리원칙과 이성의 가면을 쓰고 (내가 시기질투하는 미뢰를 갖지 못한) 분노와 원망을 담아
엄한 곳에 찔렀다. 찔렀다. 찔렀다.




나는 아직 사과나무를 심을지 말지 고민할 단계도 아니라는 점.
나무 하나 온전히 심고 키워낼 능력이 없다
요즘은 내가 방금 '능력'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게 괜찮은 것인지 되묻는 일이 많아졌다
솔직히 글쓰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스피노자의 글을 매주 읽어서 그런 것도 같고, 나도 많이 변했다.
모임 후기로 쓴 [저항을 즐겼던 자유인]이라는 에세이를 잠시 첨부한다.




평소 만연체를 너무 좋아하지만 오늘은 짧고 간결한 글이 될 것 같다.


모든 인류가 그렇듯이 내 영역 밖의 일들에 고민하면서 커왔다.
고민하기 위해선 '나의 영역 확정하기'가 필요했다.
애매한 상태는 날 괴롭게 한다. 애매한 상태로 놔두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49와 51중 어디에 가까운지... 어떤 집합에든 속하게 하는 것이 평생 과업이었다.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이제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애매한 상태를 잘 견디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난 정신적으로 건강한가? 솔직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략)

주변과 나를 통합하기보다는 분리하는 것이 익숙했던 내가
덕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으면 나도 덕스러워 진다는 막연한 믿음이 생긴 연유는 무엇일까?
정말 붙고 싶던 학교와 학과에 붙었는데도 은둔형 작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누군가에게 나를 어필해야 하고 불합리한 누군가에게 수긍해야 하며 누군가에 의해 나의 위치가 조정될 수도 있는 다양한 직업들-는 막연함이 너무 두려웠던 내가
그럼에도 좋은 사람들이랑 함께하지 못하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뭘까?


흔히 하는 말중에 끼리끼리 논다, 노는 물을 높여라, 인맥관리 해라 < 이런 말의 논지는 알면서도 너무 세속적이라 싫어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세속과 반대인가?
애초에 세속적인 것은 무엇이며 현학적인 것은 무엇이고.
나한테 두 개의 가면이 있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무한한 다양성일 수도 있는데
어느 한 군데에 완벽하게 속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미리 낙담했고 미리 굴복해왔다.
얼리버드 티켓처럼 말이다.


극단적이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일 때의 단점보다 애매할 때의 단점이 훨씬 크다고 느꼈다.
이 느낌 또한 어디에서 왔을까.
정말 미워했던 사람을 용서해야만 할 때
정말 좋아했던 사람을 더이상 좋아하지 못 할 때
정말 원했던 것을 그렇게 바라지 않게 되었을 때
나의 영역이 커지고 있던 것인데
난 저항감을 극단적으로 즐기고 있었다.

중력처럼 나를 밀어내고 나를 규정짓고 나를 가두는 입자들이
혐오스럽다고 말하면서도
안락한 흔들의자처럼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기를 바랐다.
영원히.


스피노자의 영원 안에는 요람도 무덤도 없고 얼리버드 티켓도 없다.
영원한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
요람을 깨고
무덤을 파고
티켓을 찢어야겠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정말 알고 있는가
해부학을 배웠어도 카데바를 실제로 봤어도 장례식에 가봤어도 주변 사람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면서도 웰다잉과 주체적인 죽음관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서도

정말 알고 있는가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가
안다는 말 말고더 나은 단어를 알고 있는가
그 단어를 사용하면 더 알 수 있는가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없다

빨간색 솜뭉치같은 벌레를 처음 봤다
너무 작고 빨라서 잡히지도 않는다
이런 벌레가 양재천에 세상에 있었구나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그러므로 이름을 부여했다-이리저리 빨리 움직이기라는 직업도 부여했다

나는 이 빨간솜뭉치 벌레를 아는 것일까
아니면 빨간솜뭉치T-381894를 아는 것일까
아니면 잠깐 내 동공에 머물다간 잔상을 핥아내는 것일까

건너편에 꽃을 찍는 사람이 있다
다시 그 건너편에는 캐모마일 티를 마시면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는 사람이 있다
건너편에 꽃을 찍는 사람이 카메라를 넣고 걸어간다
다시 그 건너편에는 '나는 저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빨간 솜뭉치와 저 사람, 누가 더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을까
있음이 어렵고 없음이 어렵다
죽음은 있음에서 없음으로
탄생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이진법같다가도 이분법같다가도 복잡성에 숨이 막히다가도 그냥 다 때려치고 떠나고 싶다가도 어떻게든 이뤄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어서, 무언가가 '지금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약이 있는데 먹을래?'라고 속삭인다면, 남은 일을 처리할 하루만 달라고 달라고 빌다가도, 영화처럼 그 악마는 내게 24시간 뒤에 다시 와서 영혼을 가져가겠다고 하는데, 22시간쯤 숨쉬면서 120분 가량 남은 삶을 헤아려보니, 헤아리다가, 필연적으로 눈물이 터져나와서... 130분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아마도, '삶이란게 좀 지겹긴해도 좋은건가봐' 라는 가사가 나왔을 수도.




고치고 싶은 사회 문제가 여러 개 있다.
그런데 그 하나를 고르지 못하겠다.
하나를 고친 사람은 뭐 이렇게 저렇게 살다보니 잘 되었다는 너털웃음을 짓는다.
정세랑의 책 피프티피플에 의하면 지금의 나는 선조의 물수제비를 이어받았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나 다음 사람이 나의 물수제비를 이어받는다.

오늘 아침에 소중한 인터뷰 기회를 얻어서 다녀왔는데 가슴에 꽂힌 몇 개의 발화가 있다. (발화라는 단어는-발화라고 발음하면 타오르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하는 편이다)
1. 눈에 보이는 쉬운 길로 가지 않기.
2. 실패하면 실패했구나.

길에 관련된 많은 격언이 은하수처럼 흩어져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길을 직접 만들어라, 꽃길만 걸어라 등등...
길을 걸어가겠다는 인류 공통의 의지는 참으로 치열하며 나는 이런 것에 감동을 받는다.

요즘 나를 괴롭히는 주된 고민이 없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미뤄둔 문제,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는 여전히 실존한다.
하지만 심장 바로 옆에서 콕콕 쪼아대는 심장바늘이 아주 조금 뭉툭해진 것을 느낀다.
주변 사람도 그렇게 느끼기를 바란다.


오늘도 돌을 던진다.
박테리아 한 마리도 돌에 맞지 않고
그 파문은 머나먼 사람에게까지 이롭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