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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 검은 잎/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240131 여수아침바다

 
 

한의대 동기 3명과 함께 2박 3일 여수 여행을 왔고 오늘은 마지막 날 아침이다. 제일 빨리 일어나게 되어 숙소 앞바다를 보면서 자유롭게 두드려본다. 아마 1시간 넘게 글을 쓰지는 못 할 듯싶은데 일단 시작.
 
 
 
듣고 있는 음악

 


적절한 시간제한-지금은 체크아웃 시간-그리고 적절한 변수와 계획이 남아 있는 이 상태는 제일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게 해준다. 미래란, 정해지면 따분하고 안 정해지면 두렵다. 정반대의 상태지만 결국 본질은 같다. 내일이 그다지 기대되지 않는다. 이래서 여행이 참으로 보편적인 단어가 되었나. 인간이 아침에 죽음을 상상한다면 아무리 빨리 죽어도 금일 밤 혹은 내일 죽을 거라 생각하니까. 하루 안에 출발지와 도착지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매력 있는 것이다.
 
 
답 나와서 쓰는 글이 아니다. 답을 내리려고 쓰는 글도 아니다. 답을 생각하다가 나온 글이다. 역설적으로도 내 삶에 남은 대표적인 물질 또한 글이다. (마음을 졸여가며 모은 푼돈이나 가끔 내 입으로 자랑스럽게 말해야만 할 것 같은 족적 모두 여수에서는 그다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혹여나 이 글 읽는 그대에게 유물론자에 관한 논설은 잠시 접어둘 수 있는 선심이 있다면, 확실히 그렇다. 근거명확하다. 답이 안 나왔다면 목적이 실패했으므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답이 나왔다면 목적이 달성됐으므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 답은 매 순간 필요하므로 매 순간 글을 썼다면 글이 깔끔했을 것이다. 조금씩 글을 써서 한 단계라도 나아갔더라면 글이 덜 써졌을 것이다. 모두 아니지. 그런데 계속 쓰다. 그리고 쓴다. 아, 살아감은 쓰니까 수밖에 없다.
*bitter과 write를 빨간 색과 파란 색 중 어디에 넣을지는 당신에게 맡긴다.
 
 
 
 
브리태니커의 코딱지만큼도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내 백과사전도 꽤나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적어가는 중이었다. 단순히 좋고 싫은 것을 넘어서려 했지만 돌이켜보면 오히려 넘지 못했던 활자 투성이. 그러니까 이게 좋은지 싫은지 잘 모르겠으니까 지구의 온갖 단어에게 에스-오-에스를 친 셈인데. 중언부언, 말이 길어지면 신뢰가 없다. 다 아는 이지만 여기에서 온점을 찍는다면 색도 도도 없는 거라며. 횃불만큼은 제일 고고한 것으로 지펴서 구조요청을 하는 셈이지.
 
 
 
언어가 정교해질수록 세상의 단점은 선명해진다.
 

안경을 맞추러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 어딘가 믿음직스럽지 않은 뭉툭한 덩어리에 눈알을 대고 문자 읽어 내려가기. 분명 여기에 있는 도넛이 윗부분이 파먹힌 도넛인지 아래가 파먹힌 도넛인지 알았었는데.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인생에서 5와 6은 거기서 거기가 아닌데 – <insert> 5명 뽑는데 내가 떨어지면 6등이라고 자기합리화했던 장면 삽입 – 시력판에서는 왜 그리 똑 닮았는지. 구부러진 6인지 대충 쓴 8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워지니 이거 참 뇌가 뭉툭해지는 기분이란 말이야. 총명함의 총량보존 법칙이라도 있는 건지. 제일 아둔했던 어린이 시절엔 모든 사물이 선명했는데. 바로 앞의 나무보다는 숲을 볼 줄 아는 아량과 자비심이 생겼다고 서로를 칭찬하지만 우리는 깊고 고요한 태초의 공간에서 5와 6과 8을 구분할 수도 없어졌을 뿐이다.


 
글을 쓰면 배가 고팠다.
명확하게 고파도 되는 건 배밖에 없었다.
 
양육이 제일 중요한 시절에는 양육이란 단어를 알 수 없다. 이 간단한 원리를 삶의 모든 컷에 적용하자면 당연히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단어로 조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조각질을 멈출 수도 없다. 이걸 사면초가라고부르면 극단적 허무주의자의 고막을 초나라의 노래가 가득 채우겠지.
 
 
-고개를 들어 잠시 바다만 본다-
저기 우산을 쓰고 가는 여성 뒤에 우산을 들고 가는 남성.
그리고 대한민국 남쪽의 구불구불함을 처음 맛본 나는 라면을 처음 본 아이처럼 이 광경이 퍽 낯선데.
-다시 고개를 숙인다-
 
 
돌이켜본다는 단어를 싣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나 덧없는가. 돌이켜보기 전에 죽으면 끝내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모두들 돌이키거나 들이키길 좋아한다. 하자마자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바라게 되는 이유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역설적으로 죽음이 두렵지 않으면 그 간극에 조급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걸 대중에게  아이스크림처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흘러가는 대로 산다는 말이다. 나는 대로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대로 또한 절대 실어서는 안 되는 단어. 큰 도로(大路) 말고요. 큰 도로에 질질 끌려가는 멋없는 의존 명사. 심장과 뇌를 갖고 태어난 이상 무언가가 나를 이끌기만 한다면? 피동의 행렬은 짜친다. 가끔 자연이나 영성 앞에서 겸허해지겠지만 그런 건 양수와 같아서 유속도 방향도 없다. 말 그대로 겸허하게만 하는 수단이다. 양수 안의 태아는 양수를 수단 삼지 목적 삼진 않을 것 아닌가. 하지만 대로에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휴먼 이미지는  너무 비주체적이라 속이 메스꺼웠다.
 
 
성공한 사람이 말하는 흘러가는 대로 살았어요. 눈주름과 목주름이 꼭 사이드 메뉴로 나와야 한다. 그래야 지혜 혹은 깨달음이라는 발효(醱酵)를 발효(發效)할 수 있다. 어쩌면 발포일지도. 이 나이 되도록 몰랐다는 죄책감을 탄환처럼 쏘아댈 수 있다. 우리는 나 스스로가 오발탄이라면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 되는데 가학성을 지닌 변연계392 구역의 또 다른 나는 매 순간 저격수가 되어 몸부림치는 타인을 찾아 나서기도 하니까.


신경망을 가로지르는 갈매기는 꺼억꺼억 울면서 피아식별을 통해 자아를 건설해 나간다.. 멋들어지게 다듬으면 반면교사.
 
반면교사 한 단어만 써서 내 사전을 베스트셀러 매대에 올리기가 훨씬 쉽겠다. 앞의 내용 모두 지우고 말이다. 이것저것 열심히 하기. 단어 생각하지 말고. 그러면 또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만 차근차근 해결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는 원로배우가 될 수 있다. 베스트셀러? 되면 좋지. 하지만 난 글 쓰는 게 더 행복해. 그런데 고깃집 가서 12000원짜리 삼겹살 말고 18000원짜리 항정살 먹고 싶은데 어떡하냔 말이야. 삶이 언제나 제일 좋은 옵션을 고를 순 없다지만 누구에겐 1인분 만 원대 고깃집이 애초에 옵션이 아니란 말이지. 사람이 언제나 비교만 하고 살 순 없다지만 신경망의 갈매기가 피살당하는 순간은 이미 순환이 필요 없어진 사망상태가 아니겠어? 갈매기 하나 죽이자고 속세를 떠나라는 건 말 그대로 굳센 결심이 필요하다.
 
 
굳센 결심!
형량을 쉽사리 내리기 어려운 단어의 등장이다. 널 어디에 넣을까. 두 글자로 압축하면 신념이 될 수도 있는데 고집이 될 수도 있다. 감정까지 전해지면 진심이 될 수도 있지. 그래 애당초 결심( 決心 )의 결엔 굳음이 맺혀 있다. 굳히기 이전의 생각 덩어리는 결정, 결정도 못 했다면 방향성 정도가 되겠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한 것도 여수 바다 물비늘(윤슬) 사이로 따갑게 느껴지는 괴리감 때문이었다. 단어를 알면 알수록 진실과 멀어지는 기분이다.  말하거나 글 쓰는 속도가 비교적 빠른 이유는 굳센 결심을 자주 하니까 그렇겠지. 이게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그저 고집불통일 것이고, 가끔 공감하는 사람에겐 주관이 뚜렷한 사람일 것이다. 이 평범한 문장을 쓰는 데에 만 24년이 걸렸다.
 
 
나를 좋아할 사람은 내가 뭘 해도 좋아하고, 나를 싫어할 사람은 어떻게든 싫어한다는 말이 있다. 어차피 편집될 가능성이 농후한 뒤쪽 페이지 구석에도 이 문장을 넣을 수 없었다. 낙서로도 새기기 어려웠지. 뭘 해도 날 좋아할 사람이 있을 수가 있냐고요. 난 위인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니고 세계 평화나 경제학 발전 혹은 생물 다양성이나 탄소배출 절감에 기여하지도 않았다. - 아, 위험하네. 작년 독서토론 이후 최대한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는 점에서 ‘결정적 기여’는 아니지만 ‘일부분 기여’했다고 생각할 뻔했다. 그런데 나는 며칠 전 결혼식에서 아메리카노가 너무 뜨겁다는 이유로 편하게 들고 다니기 위해 종이컵 하나를 낭비했다. -
 
 
모성애가 그토록 대단하다지만 내가 느낀 모성애는 대(大)하긴 했지만 대단하진 않았다.
부모-자식간의 니즈라고 표현해도 되는 공간이 있고 안 되는 공간이 있다. 효심과 은혜로 짜인 비단 수건으로 발까지 닦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 있고, 반대로 원망과 체념의 알약을 매일 복용하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 있다. 두 장소 모두 방문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길 때 스위치는 오작동하기 마련이다. 오작동. 장례식의 시점에서는 편향된 사전을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인데 당장 내일 혹은 이번 주는 참 심란하다고요. 처음 하면 다 낯설다는 말은 스스로에게 해주기 쉽지 않다. 나보다 덜 낯설어하는 사람이 있거든. 낯설어도 괜찮다는 용기야말로 소아과 필수 예방접종이 아닐까. 나는 어떤 면에서는 효녀이고 어떤 면에선 패륜아니까 풍부한 사전을 만들 수 있겠다만. 내가 어떤 자식인지 그다지 고심하지 않는 삶을 살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이 순간을 미치도록 후회할 것도 같아서. 내 배 갈라서 낳은 이 아이가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좋겠으면서도 왜 성적이 이 모양인지 궁금하게 될까 당연히 겁도 난다. 혈족이 생사의 경계에서 외줄타기하는 광경을 보며 자랐음에도. 서울대병원에서 손꼽는 난이도의 외과 수술이라고 수군대는 의사 가운의 행렬을 바라만 봤던 게 벌써 5년 전. '간담췌'와 '도대체'가 퍽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냐고 손금에게 말 걸었던 순간이 있다. 욕심의 피라미드에는 올라가는 길만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였어.
 
 
아마도 원래 전달하려던 뜻은 따로 있었겠지. 날 싫어하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 마라. 내가 노력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는단다. 문장을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아주 쉬운 방법은 대조법. 아주 쉬운 방법을 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바위의 생애 어떠한가. 듣기만 해도 화나는 말은 바람에 깎여서 그다지 와닿지 않는 말로 변하고. 고향을 떠나 강이나 바다를 떠다니며 얻어낸 해초로 월계수관을 만든다. 가장 바닥에 깔린 본성. 혼자만의 방에서 조심스럽게 왕관을 써본다. 통치국도 백성도 없지만 내 인식 세계에선 분명한 왕이라는 점. 그래, 미워하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 그리고 싫음을 이해하는 타이밍까지 선택할 수준은 아니라는 거.
 
 


 
세상의 부조리함이 묘사된 시력판에서는 교정시력이 1.5에 달하는 안경을 썼다가, 타인의 장단점이 진열된 시력판 앞에선 전혀 맞지 않는 도수의 안경으로 바꿔 낄 수 있을까. 자유자재로 말이다. 안경사의 잘못은 없는데 반대의 경우로 흐르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X 하는 것 같은 기분. 촉이 되면 신묘하고 짐작이 되면 불확실하고 이걸 전하면 카더라가 된다. 점집에서 하면 점술이 되고 이불 위에서 하면 망상이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갈매기는 죽일 수 없다. 보듬고 타일러서 보다 올바른 곳으로 날아가게 해야지. 그러나 현실은 갈매기에게 옷자락을 잡힌 채로 질질 끌려다녀서. 아 술김에, 아 홧김에, 아 어쩌다가, 아 어느새, 님은 안 그러냐고요, 누구나 한 번쯤은 ~ 하게 되는 거지.
 
 
시력교정을 거부하고 태초의 시력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용감하다. 아이만이 볼 수 있는 지혜 뒤엔 지금 아주 당연한 것을 모르는 미성숙함이 존재한다. 행복 앞에선 소년의 순수함으로, 슬픔 앞에선 노년의 초연함으로? 웃음 짓게 하지는 않지만 웃기는 말이다.
 


친구들(사실 언니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짧은 글은 곧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내 연필을 뺏어갔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여행이라서? 내일 국가고시 합격자 발표가 나니까? 몰라, 모른다. 언제나 단어가 감정보다 부족하다.
 
단어가 정교해지는 이유는 세상을 정교하게 보기 위함이 아니다. 세상은 정교해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만두지도 않았다. 단어를 더욱 열심히 재배하고 수확하고 있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의 주름을 세어보니, 살아온 날이 늘어갈수록 세상은 되려 아득하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단어를 곱씹을 시간을 본능적으로 마련하는 것은 최소한의 · · · — — — · · ·



* · · · — — — · · ·는 SOS의 모스부호
 
 
많은 말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건 어쩔 수 없다.
그래. 갈매기는 지금 이 순간을 좋아하나 보다.
다른 단어 다 빼도 괜찮다. 난 지금 좋다. 내 전부가 다 좋진 않지만 말이다.
 
 


 
추신
 
S#2
어떤 남성이 녹슨 파란색 가판대에 신문을 넣는다.
S#43
누가 가져갈까 싶었던 신문을 가져가는 파란 조끼를 입은 여성 
S#44
Na(나레이션) : 이토록 모르겠는 세상이 두렵지도, 그렇다고 따분하지도 않게. 최고의 중용을 원한 적 없지만 겪어온 양극단이 결국엔 괜찮은 산술평균을 내고 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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