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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 검은 잎/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해묵은 FIGHT OR FLIGHT

 

 

 

#fight or flight

요즘 읽는 책 대부분에 나오는 개념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인데 지금 여기에 대해 자세히 논할 생각은 없다.

https://health.clevelandclinic.org/what-happens-to-your-body-during-the-fight-or-flight-response

 

What Happens During Fight-or-Flight Response?

Stressful situations can come out of nowhere — and our bodies react accordingly as a way to protect us. Here’s what happens when you go into a fight, flight, freeze or fawn response and how to manage it.

health.clevelandclinic.org

요지는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나를 근래들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난 현재 인턴으로서 객관적으로 제일 힘든 과를 돌고 있다. 시작 전부터 체력적으로 고갈되고, 정서적으로 상처받는 일이 많으리라 두려워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당연히 지치고 힘들긴 하지만 제일 괜찮고 가끔 재미까지 있다. 

 

#fear1(done)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것 중 하나는 본과 3학년 여름방학 때의 발목 수술이다. 한 달이나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 너무 두려웠다. 포모라는 단어를 인지하기도 전인데.. 다들 바삐 움직일 (특히 방학이라는 절호의 찬스) 시기를 그냥 놓친다니. 평균에서 100억광년 멀어질 것만 같았다. 

#fear2(done)

그 다음으로 무서워했던 순간은 현재 일하고 있는 병원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순간이었다. 바로 다음에 내 소속이 어디이며, 하루 중 대부분을 어디에서 보낼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합격 발표일은 어차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변인이 아니니까 미정의 순간을 즐겨야지 하면서도 난 고통스러운 디데이를 셀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밀도는 매일 깊어졌지만 실제로 무언가를 하지 않았던 걸로 봐선 ..흠.

#fear3(yet)

두려우리라 상상했던 순간은 바로 지금 그러니까 정신과 레지던트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 합격자 발표가 늦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고 순탄하게 내가 픽스가 되리란 기대는 입사 전부터 없었다. 티오가 날지도 몰랐던 상황이니까. 그런데 막상 손에 잡힐듯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가 손톱을 통해 마이크로파로 느껴지긴 하는 거야.. 

#fear4(doing)

최근에 깨달은 해묵은 두려움은 유기공포다. 혼자 있는 것에 대한 공포보다는 유기 과정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다. 처음부터 없었으면 그냥 그럴 것도 줬다 뺏으면 참 짜증나지 않는가. 인간은 무를 견딜 수 있으나 유에서 무를 지켜보는 과정은 끔찍히 두렵다. 방법은 없다. 두려워하는 나조차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빠져나가는 것을 억지로 쥐어봤자 손 사이로 마저 빠져나간다. 속도가 좀 늦춰질지언정 결국 손에 남은 건 손금 뿐이다.

나는 그동안 두 개념을 좀 헷갈렸다. 고독에 대한 공포와 유기에 대한 공포. 분명 내가 참 독립적인 사람 같으면서도 한심하게 [추상]에 매달린다. 과거엔 그랬지, 아마도 그럴 거야, 원래 이런 법이야, 이럴 가능성이 크니까, 이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등등..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먹거나 맡지도 않은 덩어리를 과하게 확신했다. 나는 그게 눈보라치는 언덕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한 그루의 소나무와 같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생각 덕분에 [이정도]라도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유기

그러니까 해묵은 생각을 유기할 용기

이 글은 그 첫 일기

 

#자전거

한동안 자전거를 많이 탔다. 엄청난 사색가도 될 수 있고 무적의 라이더가 될 수도 있었다. 내 세상 안에서 말이다. 나는 자전거를 날쌔게 타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건 자주 없다. 넘어져도 되었고 추월당해도 되었다. 이런 자유는 몇 없다.

몇 없는 퇴근 날 중 하나. 춥지도 덥지도 않았고 해가 떴던 걸로 봐선 주말이었다. 집으로 갈 수 있는 3개의 루트 중 처음 보는 3번째 루트를 골랐는데 한 여자고등학교 주변에서 어이없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유래없는 내리막길을 내려간 적이 있다. 연달아서 말이다. 올라가고 있는데 힘이 들고, 내려가고 있는데 손쉽다. 인생의 오르막이니 내리막이니, 인생의 꺾은선 그래프니 하는 단어들이 비로소 심장 판막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힘들면 그거대로 떡상(?) 준비 중인 거고, 손쉬우면 그거대로 재밌는 거고. 별 메시지 아닌데 그냥 그 이후부턴 사소의 영역이 커졌다. 안 사소했던 게 많이 사소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섬세한 인간이라는 자기위로는, 계피가루처럼. 솔솔.

추월당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치타보다 빠르게 달리려는 사람들에게 길을 자주 양보했다. 음악을 듣는 중이기도 하고 따릉이가 비싼 자전거를 이길 리가 없어서 어느순간 부터는 제일 오른쪽으로 빠져서 탔다. 그럼에도 수치스럽지 않고 즐거웠다. 중요한 영역에서도 이런 여유, 이런 호사를 부릴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상당히 바쁜 과를 도는 11월 중후반의 내가 좀 시도하고 있다. 좀 늦으면 어때...제 시간에 못 끝내면어때.. 

 

#업up

재활과 환자들 덕분에 인턴이라는 직의 자긍심이 생겼다. 늘었다기보다는 생겼다고 하는 게 맞겠다. 없었다기보다는 몰랐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존재 자체에 대한 수치심부터 오늘 하루에 대한 수치심까지. 알록달록한 사탕을 파는 가게처럼 내 수치심 가게는 24시간 영업 중이었다. 그런데 이젠 가끔 마감도 치고, 사탕을 자체폐기하기도 한다. 내가 날 그렇게까지 싫어할 이유는 없었는데 그냥 그게 익숙하고 편하니까 그랬다는 것. 이 생각을 이번에 처음 한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알던 메시지였는데 그냥 그 빈도가 늘어서 적는다는 것. 새삼 ? 생색 ? 시옷이 많이 붙은 단어 몇 개가 스쳐가는데 그냥 스쳐가도록 둔다. 유난인지 아닌지는 사실 판단할 수 없다. 모든 부분에서 말이다. 유난은 시간을 배제한 단어인데, 시간이란 함부로 배제할 수 없는 요소가 아닌가.

 

#들꽃

짧은 3주지만 복싱까지 잠시 홀드했고 수면 시간을 늘렸고 약속 종료 시간을 앞당겼다. 집 근처 헬스장에서 적당히 유산소를 하거나 그냥 씻고 푹 자는 퇴근 날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제일 두려워했던, 그냥 일만 하고 끝나는 하루. 심지어 내가 원하는 과도 아니고 원하는 과를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불안정성만 맛본 채로. 눅눅하게 녹은 아이스크림. 그런데 그냥 씻고 자니까 다음 날이 조금 더 상쾌하고. 거울 속의 내가 조금 더 귀엽고 예쁘더라고. 그냥 내가 나를 잡초가 아닌 들꽃정도로는 봐주기 시작한 기분이다.

 

#지지

요즘 호흡, 명상에도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불안할 일을 스스로 만들기도 했고 실제로 많이 불안함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인데놀을 먹으면 손쉽게 해결되겠지만 손쉬운 건 내리막길일 수도 있으니까. 나는 이번에 조금 고통스러운 오르막길을 올라보고 싶었다(어쩌면 내리막길 준비과정일지도 모름)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나를 지지하는 존재들을 생각한다.(내면양육자)

내 심장 이미지를 생각하는 바디스캔

이 2가지는 가끔 써먹었는데 효과가 은근 있었다. 이것조차 통하지 않는 고난이 오면 그냥 그때 생각하기로 한다. 이건 날 유기하거나 방임하는 일이 아니고 그냥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 사서 걱정하지 않으려고. 잡초도 고민은 싫거든.

 

 

#목적

없는 글이다.

생각보다 빠르게 12월이 찾아왔다. 느닷없이 2025년을 맞기는 싫다.

조금 더 견고히 연습해야 할 부분을 30일동안 잘 분배해보려고 한다. 연금저축도 해결하고...

 

#illusion

두려움은 환상일 뿐이라는 말은 한동안 종종 생각날 것 같다.

내가 사랑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환상이고

내가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두려움이고

내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내가 버림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환상이고

내가 버림받을 거라는 생각도 환청이자 환시이며

버림을 받든 사랑을 받든 아무튼 그런 건 내 존재가치에 하나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대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오늘 시간을 채우는지는 내 존재가치에 영향을 미친다.

그건 내가 정한다.

정할 수 없는 것 말고 정할 수 있는 것을 정한다.

 

 

#그래도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순간조차도 꽤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졌다.

그냥 이렇게 음악 들으면서 자음과 모음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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