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치는 것이 싫다.
싫다는 말은 싫다. 허접하다.
빨간 색이 싫다. 오이가 싫다. 가지볶음은 짱 싫다. 그 정도의 기호에 내 생각을 흘려보내면..
묘비엔 '이것저것 다 싫어한 사람. 좋아하는 것만 한 사람. 그런데 그마저도 별 거 없던 사람'
지금 듣고 있는 글쓰기 수업. 딱 한 회차 남았다.
계속 우울했다. 워낙 글솜씨가 괜찮은 분이라는 칭찬 하나 들으려고 내가 일요일에 이런 돈과 시간을 쓴 것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다. 칭찬 5g과 비판 2g을 적절히 배합해서 완벽한 글쟁이 쉐이크 300mL를 얻으려는 속셈은 비열하다. 적절히 나를 깠으면 좋겠고 충만히 내 가능성을 인정해줬음 좋겠다. 부모 찾기 대탐험이 아닌가. 어디에서 부모를 찾아야 하는가. 각종 신화와 민담을 읽으면 종종 눈물이 난다. 어떤 종족이든 태초의 근원을 찾아 떠난다. 골수까지 타버릴 것 같은 사막에서도, 심근까지 얼어버릴 빙하에서도. 그녀는 무조건적으로 풍만하다. 가슴 크기든, 마음씨의 크기든. 우리는 모두 무한히 너그러운 절대자를 마음에 품는다.
조금 욕심을 부려도 되는 글쓰기 실력은 아닌 것 같다. 글과 멀어지면 국문과를 간 것이 후회되고 글과 가까워지면 국문과를 안 가서 다행이라고 안도한다. 더 잘 쓰고 싶다는 말을 낱낱이 벗겨보자. 잘 쓴다고 인정을 받고 싶은 건지. 나 혼자 오롯이 재밌는 게 가당키는 한지. 사회적 욕구가 1도라도 빗나가면 관심종자니 소시오패스니 평가해대긴 참 쉽고. 평가를 퍼나를 수단도 충만한 상태. 충만해야 할 것은 바짝 동이 났고, 유래 없던 것이 흘러 넘치면서. 사람들은 지구가 (아니 대한민국이) 곧 망할 거라고 하는데 애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며칠 전에 교보문고에 가니까 대한민국이 숫자에 지배됨을 통탄하는 책과 부의 추월차선이 한 책장에 있더라고.
수업이 끝나고 편집장님께 이것저것 물어봤다. 한계를 넘어서려면 어떻게 하나요. 당연한 대답이 손에 담긴다. 손바닥 정중앙에 물이 고이듯. 촉촉하지 않은데 축축하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고치고. 문법 준수하되 독창적인 표현으로 가득 채우라. "지금 눈 앞에 회색 책장이 그냥 회색이 아니죠?" 나도 알아, 알아, 아는데. '죽은 생쥐의 가죽을 벗긴 회색' "모든 글은 내면화예요." 당연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당장 내가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나를 떨어뜨렸던 그 공모전에 재도전? 클래스 101에서 웹소설 클래스 듣기? 주황색+검은색 책 추종자들이 양산하는 블로그 글쓰기에 편승? (난 순행자다.) "이름을 가리고 봐도 이 사람 글이다, 알 수 있게 쓰세요." 오만하지만 내 글만의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은 한다. 굳이 따지면 내 스타일에 열광하는 사람을 못 봤을 뿐이지.
수정도 퇴고도 없는 이 자유로운 공간에 아무리 열을 내봤자 난 그대로일 것이 분명하다. C-정도 되는 글을 20분 동안 썼다면 17분 안에 쓰게 될 정도. 딱 이정도 성장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글 성적은 형편 없다. 편집장님께서 강조하시길, 대충 빨리 쓴 글은 누가 쓰든 별로라고. "나도 글 오래 써요." 네네... "기은 님, 다음엔 글 한 번 제대로 써보세요. 마지막이잖아요."
두렵다. 글의 한계를 깨부수는 법까지 물어놓고, 더 별로인 글을 제출할까봐. 마지노선을 정해두고 경험과 성장을 좋아한다고 나불거리는 진짜 안정파. 겉과 속이 다르다.
그래도 이렇게 끝나지 않기 위해서 이번 글 주제에 대해서 매일 10분씩이라도 글을 써볼 예정이다.
초안보다 더 별로면, 했는데도 안 된 거니까. 개운하게 작별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주 과제는, 글과 (잠시) 헤어질 결심이다.
물론 이제 정말로 국시 공부도 해야 하고. 다음 글쓰기 수업은 중간고사 중간에 껴있다. 좋은 상황은 아니다. 고민 이꼬르 고통. 내가 감내할 고통은 내가 선택한다. 그러니까 시험 전날에 써머리를 달달 외워도 모자랄 판에 충무로에서 글 가지고 씨름하는 것도 내 선택이다. 내 선택은 내가 책임진다. 그래왔잖아,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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