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알파 이기은

반년 전 로마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헤어질 결심을 봤다. 큰 기대 없이 튼 영화였는데 너무 재밌었다. 잔인한 장면을 싫어한다는 1원칙에 의해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당연히 제껴왔는데, 탕웨이와 박해일의 연기는 물론이고 몇몇 단어에 감겨버리고 말았다. 예를 들면 마침내. 그리고 비행기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꽤 아늑했고 좋은 경험이었다.
지금은 인문학 대외활동을 위해 인천공항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노트북 충전기와 침을 놓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침은 룸메 놔주기로 했는데 .. 그리고 노트북 충전기 없어서 디제잉 영상 못 찍을 것 같다..) 요즘은 마음에 걸리는 일을 생각보다 슉슉 풀어내고 있다. 준비성이 부족했던 나를 꾸짖고 하대하는 것은 참으로 쉽고 익숙한 일이지만 내 친구나 아이가 이런 일일 겪는다면 글쎄. 안 꾸짖을 것 같고 그럴 자신이 생기고 있다. 반면 부모님이나 애인이 그랬다면 나는 독설을 내뱉었을 거라서 두 종류의 관계는 전쟁처럼 휴전 중이다. 본 영화에 대해서 아는 바는 거의 없었다. 재밌다고 말하는 사람 몇 명, 호불호가 갈리고 정신 없다고 하는 사람 몇 명. 메타버스를 다룬다는 것이 사전정보의 전부. 중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듣는 영화인지도 몰랐다. 메타버스 자체에 흥미도 없는데 그래도 재생해본 연유는.. 아이패드로 보고 있던 책이 갑자기 재미가 없어져서? 영화 초반 10분 후기는- 아! 정신이 없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다. 하지만 내 사고 흐름과는 꽤나 잘 맞았다. 영화에 한에서는 너무 잘 이해돼서 술술 넘어가는 것보단 적당한 빈도로 앞으로 돌려보게 되는 편이 더 취향이나. (반면 자기소개서를 지도할 때에는 앞부분으로 되돌아가서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글 그러니까 불친절한 글은 지양함) 사실 이름 외우기도 버거운 일본인들이 잔뜩 등장하는 살인사건 소설이 내 취향이니. 감상이 업무가 아니라 향유일 때엔 적당한 복잡함이 감미료란 뜻이다. 영화와 드라마 중에선 드라마가 좋고, 영화나 영화관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래도 좋아하는 영화를 꼽아보라고 하면 인터스텔라, 설국열차, 너의이름은-날씨의아이를 말한다. 결이 조금씩은 다르긴 하지만 모두 현실 세계를 넘어선 무언가를 조망한다.
우리는 그 무언가를 정의내리고 전파하기 위해 현실의 도구를 빌린다. 사람, 두 발로 걷고 두 팔을 쓰는 사람, 피부색과 눈동자 색이 다르고, 손톱과 발톱도 다르고, 목소리도 종교도 성 정체성도 다르다. 관념과 체제가 세상을 둘러싸고 갈등과 화해는 반복되며 냉소적인 허무주의와 자애로운 인류애에 동시에 귀 기울이게 한다. 옆에 앉은 사람이 겪었다면 가끔 기만하거나 무시하게 될 일들은 영화라는 이유로 - 영화 소비를 위해 들인 돈과 시간에 걸맞게 - 우리는 성실한 고민상담사가 된다.
본 영화는 내가 매일매일 상상하는 다양한 장면들과 읊조리는 여러 문장들을 비슷하게 담아냈다. 지금까지 봐온 영화 중에 제일. 메타버스라는 단어만 빼면 말이다. 다른 우주에서의 수많은 선택과 실패와 후회을 상상하는 내게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리얼리티 다큐 같았다. 내가 줄기차게 말하는 후회의 순간 원탑 대학교 선택하기에서부터 당장 오늘 새벽 짐싸기까지. 사소한 결정과 운에 의해서 수많은 것들이 변하고 난 여기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기보다는 무력함을 느껴왔다.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대개 에블린이 다른 선택을 했을 시에 펼쳐지는 상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부분들이다. 특히 눈을 다치지만 유명한 가수가 되는 장면. 달려가던 어린 아이에게 뛰지 말라며 걱정하는 아저씨가 나오고, 넘어지는 아이, 땅 바닥의 두 나뭇가지, 눈에 덮개를 대고 누운 아이, 이후 눈을 감은 가수의 등장. 매우 짧은 순간에 시각과 청각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삶의 압축본이 인상적이라 10번은 다시 돌려 봤다. 충분히 진부하게 풀어낼 수 있는 클리셰를 이렇게 쫄깃하게 표현하다니. 두 나뭇가지를 배치한 구도나 색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 영화는 결국 클리셰다. 인과응보 권선징악의 툴을 벅어나지 않는다. 가족의 사랑, 인정, 엉망진창이지만 괜찮아, 우리 조금 더 다정해볼까요. 우리는 이런 지점에서 뻔하다고 느끼면서도 안정감을 느낀다. 만약 조이가 정말로 엄마를 떠나버려 혼자 베이글로 들어가거나 엄마가 가족을 버리고 베이글로 들어가거나, 아님 조이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헉! 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 실망할 것이다. 찝찝하려고 영화를 보는 경우는 많지 않기에. 베이글은 블랙홀처럼 그려지는데, 결국 죽음이다. 그리고 난 조이의 설명을 듣자마자 자살을 연상했다. 자살을 소망해본 이들은 결국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는 표면 공리가 있고 그 밑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확신과 함께. 지금은 여러모로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독립을 했고, 나머지 부분은 준비 중이고, 졸업도 코앞이다. 반면 15살보다 어린 나이에는 독립이 정말로 먼 미래 같았고 난 그래서 자살을 계획하고 상상했다. (다 힘든 시절이 있으며 지나간다는 맛없는 조언을 하는 어른이 되지 않도록 난 매순간 괴로움에 풀피로 맞선다. ) 감독은 내 유년시절의 상상을 영리하게 풀어냈다. 베이글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즉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 대사의 원문은 nothing matters. 다정함을 외치는 아빠에게 흔들리는 주인공. 딸 조이는 시간을 벌어준다며 말하길 기쁨도 희망도 결국엔 사라진다며. 하지만 총알을 눈알로 바꿔버린 그 다정함은 혼돈을 느끼는 군중, 그들의 수정체를 겨냥하게 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조이는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건지 의문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난 그런 의문은 없었으나.. 의문이 없다고 해서 확신이 충만하다는 것은 아니다. 조이가 그런 상태다. 눈이 아플 정도로 알록달록한 옷과 화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조이는 의문도 확신도 가질 수 없는 상태였다. 나와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영화 중반부부터는 눈물이 나오더니 막판엔 대성통곡했다. 조이가 하고 다닌 모든 행동은 사실 내 꿈에 한 번쯤은 등장했던 장면들. 잔인한 장면을 중추신경계가 거부해서 대한항공 베개로 화면을 가렸다 뗐다 반복했지만. 피가 튀기고 도덕규범이 없는 장면은 사실 중학생 때 매일 꿈꿨다. 희망했다는 게 아니라 정말로 꿈에 나와서 악몽에 시달렸다는 뜻이다. 12일 연속으로 가위를 눌린 내게 해독약은 덕질과 문학이 전부였는데.. 조이에겐 그것이 여자친구였겠지. 이런 조이에게 다정한 사람을 우주가 내려줄 거라고 말하는 엄마의 말이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조이는 베이글을 만든 이유가 사람들을 파괴하려고가 아니라 나 자신을 파괴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자살이 아니라 태초로 되돌아간다고 하면 더 우아해보이려나. 긍정적 허무주의는 뭔가 있어보이는 합성어같으면서도 어려운 단어는 아니나. 그러나 행동 하나하나에 그 철자를 입히는 것은 무척 어렵다. 나 역시도 삶이 기적같기보다는 꽤좆같다. 영화 내내 조이가 행복해보인 적이 있던가. 그저 상처받은 영혼이 투정을 부린다고 관조할 수 있는 관객은 복받았다. 거울치료 당하는 기분에.. 잔인하고 역겨운 장면이 꽤 많이 나왔음에도 영화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에블린의 딸 조이는 동성애자다. 에블린은 처음에 조이의 여자친구 베키를 할아버지에게 소개할 때 그냥 친한 친구라고 말했지만 마지막엔 조이의 여자친구라고 또박또박 말한다. 당연히 조이는 여기에서 감동받지 않고 뛰쳐나간다. 너무 당연한 반응이다. 이미 마음은 상처가 났고 나는 그녀를 미워하라고 프로그래밍 되었다. 용서와 화해도 기쁨과 희망처럼 잠시일 뿐 다 사라지는 셈. 베이글 앞에 선 엄마는 조이에게 ‘할아버지는 세대가 달라서’라고 한다. 옳음. 옳다고 생각해서 행한 행동. 옳음은 두려운 이들이 만들어낸 상자. 엄마는 어떤 상황에든 나를 위해서 옳은 일을 행할 거라는 믿음. 옳음은 두려운 이들이 만들어낸 상자. 엄마의 두려움이 만든 상자는 언제나 엄마에겐 옳다. 그래서 문제다. 조이는 차에서 체념한 얼굴로 각자 살자고 말한다. 둘 다 다치고 지친다며.
난 엄마를 꽤 사랑했다. 가물가물하긴 한데 며칠 전 엄마의 서랍에서 내가 썼던 편지를 발견해버렸다. 짜증내서 미안하다, 공부 열심히 해서 호강시켜주겠단 말이 자주 등장했다.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님께 쓰는 편지는 의무교육의 필수코스다. 초등학교 입학인 8살 무렵부터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늘 포문을 열었다. 왜 낳았냐고 따지는 글은 아니었다. 정말 왜 사는지 모르겠어서. 낳았느니까, 태어났으니까 산다는 답은 들으려고 쓰진 않았지. 그 답을 진지하게 고민해주는 부모를 못 만나서 오래 괴로웠다. 삶에 별다른 이유는 없고, 이유를 불문하고 너의 존재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말해주는 부모 [조우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100일 동안 마늘을 먹어서 곰이 되는 것이 더 쉬워 보였다.
삶은 왜 당연하게 소중하고 귀한지 ..
그 답은 어디에서 얻는지..
차근차근 알아가고 있으며 이번 여행 또한 그러하리라.
물론 엄마 입장에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가, 왜 태어났는지 고민하고 죽고 싶어 하면서 방 청소도 양치도 제대로 안 하고, 웬만한 쌍둥이 아동이 먹는 것 이상으로 먹어대서 학교에서 비만 아동으로 선정되니 짜증이 났겠지. 현실적인 가치. 과도하게 비대된 자아상을 잠재울 수단은 아니지만 성찰한 지점은 된다. 내가 가르침받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가르쳐준 사람이 정녕 없었던 것인지. 전자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확신이 없다는 소리다. 아무튼 그런 [현실적 가치]를 20살 넘어 뒤늦게 채우는 요즘이라 마라톤 꼴찌가 된 느낌이다. 결국 꼴찌라는 관념도 타인이 정한 출발선과 도착선에 의해 생겼지만 괴테가 말하는 지향처럼, 지향이 있는 한 선두주자와 질투는 발아한다.
근래들어 내가 딱 내린 결론이 가족과 나는 분리되어야 행복하다는 것. 독립하면 애틋해진다는 대부분의 가족 부류를 따라가게 될지 아니면 정말 남남처럼 살다 서로의 생사도 모르는 것으로 결론이 날지 아직 잘 모른다. 언제부터 어디서 얼마를 벌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당장 독립-주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머리가 아픈 요즘이기에. (그래서 한국에서 결혼-출산을 할 것인가? 종국엔 집을 소유하기 위해 다양한 것들을 포기할지도 정말 고민임. 차 욕심은 없어서 다행..;;)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대사는 에블린이 조이를 마지막으로 막을 때 한 번 더 나온다. 온 우주에 내가 있다. 모든것은 미립자의 불완전한 순간의 형상. 그래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래서 떠난다? 아니, 그래도 여기에서 너와 함께 하고 싶다는 엄마의 대답. 조이는 그걸 기다려왔던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부터 부모님에게 갈구했던 대답도 그와 같다. 저 우주의 조이는 그 대답을 마침내 들었지만 이 우주의 이기은은 듣지 못했지만..
이 우주의 이기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애석한 일인지 다행인 일인지 아무튼 알파 이기은을 만나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우주가 내려줄 다정한 무언가. 내가 먼저 다정해지면 그런 다정함을 어떤 방식으로든 만날 날이 오겠지.
난 그래서 더 살아보기로 했다. 이미 죽고싶다는 말는 금연 클리닉 성공이 코앞인 사람마냥 많이 줄이긴 했으나 더 덜 죽고 싶어 졌다. 이 영화 때문에? 아니 덕분에.. ?
이런 영화 시나리오 쓰는 것은 얼마나 짜릿할까? 질투도 났다. 마침 영화를 보기 전 읽은 책에서 말하길 창의성은 우연의 영감이 아니라 영감을 집요하게 다듬어내고 실현하는 능력이라 한다. 나는 부싯돌처럼 타닥타닥 상상의 불꽃을 피워내지만 불은 곧바로 사그라든다. 활활 타오르는 창의력을 위해서 앞으로 더 창작 노트에 활자를 새겨 나가야지. 출국 전날 조금 무리해서 진행한 한방무용치료 박사님 인터뷰와 이태원 전시회 디제잉도 큰 힘이 되었다. 하나는 포기할까 했는데 그래도 난 덕분에 불씨 지필 장작 하나 얻었음에.
독일 인문학 기행에 함께해주시는 교수님의 말처럼
내가 선생님이 없다면
내가 나의 선생님이 되어주어야 한다.
엉망진창이지만 괜찮아 기은아
좋아하는 일을 잘 못해도 괜찮아 기은아
또다른 우주의 내가 열심히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며 날 돕고 응원한다는 상상. 거짓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자주 해오던 그런 상상. 영화로 만들어준 감독에게 감사하며, 내 허무맹랑한 관념이 현실을 외면하는 찌질이로 보이지 않도록. 확실하게 하지만 조금 더 다정하게. 여러가지 일을 복작복작 조금 더 해봐야지. 일단 독일에서 다양한 행복을 느끼고 와야지.
난 널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끔 점핑해서 날 도와줘.
그럼 나도 진심으로 너를 위해 기도할게.
from 여기 이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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