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저마다 참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요즘이라 더욱 강하게 느낀다. 정해진 시간을 초과해서 더욱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기준 또한 매번 모호하다. 나와 공통점이 매우 많지만 어딘가 나의 단점을 모아놓은 듯한 싱크로율에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고, 반대에 끌린다는 말처럼 색다름에 매료되는 경우도 있다. 어딘가 통하는 그 느낌은 짜릿한 싱크로율이고, 몇 분 안에 '이 사람은 나와 너무 달라서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호감을 느낀 사람에게 친구로, 애인으로, 선후배로, 선생 혹은 제자로 (이외의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다가간다. 상대도 나와 비슷하면 우리 사이에 특정 관념으로 이어진 선이 생긴다. 호칭이 탄생한다. 비바람을 맞아 그 관념은 더욱 단단해지기도 하고, 조각나기도 한다. 떨어져 나온 돌조각은 펑펑 울다가 또다른 파편을 만나 또다른 관계를 맺는다. 눈물은 접착제 역할을 한다. 그렇게 광활한 토지가 생성된다.
셀 수 없이 많은 충돌로 떨어져 나온 조각들과 다시 한 번 맞서 싸우면서 우리는 정신과 신체의 변용을 견뎌내야 한다. 우리는 가능한 각각의 감정을 명석판명하게 알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명석판명하게 지각한 사물들만을 생각하도록 하여 정신이 완전히 만족하게 한다. 나아가 감정 그 자체는 외부 원인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분리되어 참된 생각과 결합할 수 있다. 그 결과, 사랑과 증오 및 이와 같은 감정들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감정들에서 일반적으로 생기는 욕구 혹은 욕망도 과도하지 않게 된다. (에티카 5부 정리 4의 주석 中)
사람은 모두 본인들의 정신적/신체적 만족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지각하든 그렇지 않든, 의도된 혹은 의도되지 않은 욕망과 욕구를 반영한 행동을 통해서 추구한다. 타인을 포함한 외부 사건들의 조각이 나의 조각과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지는, 짜릿한 싱크로율로 가득찬 세상이면 좋겠건만. 살아간다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현상들이 훨씬 많다.
영적 체험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신체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공중을 떠다니는 상상을 자주 한다. 상상인지 망상인지, 욕망인지 욕구인지. 정확한 단어를 갖다 붙이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하루에 몇 번 정도는 자발적으로 몸에서 정신을 분리하고자 한다. 중학생 때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혹은 시험 직전에 큰 집중력을 발휘해야 할 때에는 우주 느낌이 나는 노래를 모은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며 눈을 감았다. 두피를 벗겨내고 두개골을 갈라서 흐물거리는 뇌를 쥐어짜고 정신 덩어리를 빼낸다. 경동맥에서부터 대동맥까지 한 번에 빼내는 것이 관건이다. 어릴 때 이집트 문명전에서 본 미라를 만드는 영상을 표상한다. 시체에 갈고리를 집어넣는 마음으로. 작년에 요가를 시작하기 전까지 불건강 그 자체였던 신체에서 정신을 빼내는 상상을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했다. 10분에서 15분 정도 신체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정신 덩어리를 상상하고 우주에 마음껏 흩뿌리는 상상을 한다. 실제로 내게 이런 시간이 주어졌을 때와 아닐 때의 효율은 꽤나 달랐다. 실리적으로 따져보자면 단시간에 많은 양을 외울 수 있었고, 눈의 피로가 풀렸으며, 편두통이 조금 덜해졌다. 약물을 주입한 것도 아닌데 특정한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신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 한동안 신기해 했다. 어디서 조언을 들은 것도 아니고 언젠가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해오던 행동이다.
사랑과 증오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원동력이다. A에 대한 사랑으로, B에 대한 증오로 나의 알을 많이 깨왔다. 동시에 타인의 알에 꽤 많은 금을 가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원하는 타인에게만 영향을 받고 원하는 타인에게만 영향을 주는 삶을 꿈꾸다가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무인도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갈망하다가 그것 또한 불가능함을 안 지금. 나는 누구와 어떻게 상호작용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주 상상한다.
결정되었지만 예측할 수 없는 충돌들. 의연해야 한다.
5부 정리 10의 주석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나에 대한 저격글을 읽은 기분이다.
아직 감정에 대해 완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올바른 생활 원리 즉 확실한 삶의 규칙을 세우고 기억해서 삶에서 빈번히 마주치는 특수한 상황에 지속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이다. 필요할 때 이성의 규칙을 항상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에 대해 그리고 이 잘못을 어떻게 아량으로 쉽게 물리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숙고해야 한다. 사람들도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필연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을 명심하면 증오를 쉽게 극복할 수 있고 분노 또한 더욱 빨리 극복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사물에 존재하는 좋은 점에만 주목하여 항상 기쁨의 감정으로 활동하도록 해야 한다. [명예의 올바른 사용, 명예를 추구하는 목적, 명예를 획득하는 방법]과 [명예의 오용과 공허함, 인간의 변덕]은 다르다. 명예를 얻지 못해 화를 쏟아내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에게 현명하게 보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가장 야심이 큰 사람이다.
나쁜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도 마음도 나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이 탐욕스러울 때 부의 오용과 부자들의 악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함. 그래 나는 나 자신의 가난과 타인의 부를 아직도 차분히 견뎌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에티카 5부 정리 10에 따르면 나는 덕목과 덕목의 원인이 무엇인지 인식하려 노력하고 나 자신을 참된 앎에서 생기는 기쁨으로 채우려 노력해야 한다. 악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며 인간을 헐뜯지 않아야 한다.
총알을 받아낸 나는 결정해야 한다.
정신과 신체 그 사이 어디쯤에 박힌 총알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든 끄집어내서 우주에 흩뿌릴지.
아니면 당장은 괴롭지만 나의 사고를 끊어내는 연습을 할지.
악덕에 대해 숙고하고 내가 혐오하는 나의 모습을 가진 타인들을 헐뜯으며 나의 숭고한 모습을 갈망했고, 덕목 자체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았다. 명예의 오용과 공허함을 부르짖다보면 명예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줄 알았는데. 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연결에 대해서는 변명을 해보자면 나의 집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어서. 그러니까 나는 집을 나설 때가 되었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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